미술에는 답이 없다. 미술사에 한 획을 그은 이들은 모범답안을 비웃고 부수며 사회에 새로운 물음표를 제시했다. 전통에 도전하고 패러다임을 바꾸는 것이 미술의 정신이라면, 미술 교사에겐 학생이 그 정신을 내면화하도록 도울 책임이 있다. 하지만 수업 현장에서 아이들은 쉽게 말 흐리고 눈을 피한다. 만들던 작품을 살짝 가리며, 멋쩍게 덧붙인다. “망했어요. 전 원래 미술 못해요.”
우리나라 미술 교육은 N차 교육과정 개정을 거치며 혁신적으로 진화해왔다. 요즘 미술실에는 이젤과 석고상, 4B연필, 수채물감 대신 박스테이프, 포스트잇, 재활용품, 오일파스텔이 자리한다. 실기 능력보다 창의력을 중시하며, 한 가지 대상을 똑같이 따라 그린 작품을 대놓고 서열화하지도 않는다. 그래도 여전히 미술에 자신 있는 아이보단 자신 없는 아이가 대부분이다. 지난 세월을 돌아봤을 때, 내 수업이 아이들을 겁 없이 도전시켰노라 당당히 답할 수 없다. 업무와 담임 반에 쫓기며 수업엔 적당히 눈 감는 날도 많았다. 일부 눈 반짝여주는 아이들에게 위안을 얻으며, 소극적인 아이들에겐 잘 하고 있다며 서로에게 의미 없는 염불을 욀 뿐. 멋몰라 매 순간이 특별했던 신규 교사의 수업 시간은 정해진 진도를 기계적으로 무사히 소화하는 공정으로 변해있었다. 그렇게 듣기 싫었던 ‘원래 못한다’는 문장도 마음 한구석에 둥지를 틀었다. ‘원래 미술은 좋아할 사람만 좋아한다’, ‘원래 모든 사람을 이끌고 갈 수는 없는 법이다’, 하고. 낡은 수업 재료와 기법에서 벗어나는 데는 성공했을지 모르나 정작 미술의 정신을 일깨우는 데에는 실패한 것이다.
시들었던 마음은 다양한 수업 사례와 교육학 및 전공이론을 새로이 접하며 다시 꿈틀대기 시작했다. 아이들이 좋아할 만하면서도 내용도 전달할 수 있는 수업 소재는 의욕에 불을 지폈고, 수업에 유용한 정보는 평가계획서 속 문자로 남아 몇 달간 이정표 역할을 할 것이다. 하지만 1정 연수가 그저 문서 몇 페이지로 가치를 다한 것은 아니다. 연수 중 한 강사님의 질문에 나는 말문이 막혔다. “병뚜껑이 열리지 않았는데 물을 부으면 들어갈까요?” 순간 그동안 나를 짓누르던 무기력의 진짜 원인을 깨달았다. 수업 이전에 사람 대 사람의 관계였다. 상대의 마음을 열지 못하면 어떤 지식도 그에게 흘러 들어가지 않는다. 동시에 스스로 또 다른 질문을 할 수 있었다. “물을 따라주어야 하는 내 뚜껑은 열려 있었던가?”
선생(先生)은 앞서 태어난 선발대다. 태어나기만 했는가, 예비 교육자로서 이리저리 공부하고 소양도 쌓아왔다. 그러니 손도 먼저 내미는 것이 마땅한데, 임용 지식으로 다져진 신규 교사는 정작 마음을 두드릴 줄은 모르는 사람이었다. 사랑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으나 어떻게 표현해야 하는지 몰랐고, 나의 표현이 곧 만만하고 못 미더운 교사로의 방아쇠가 될 가능성이 오랫동안 두려웠다. 열지 않았고 두드리려고도 하지 않았으니 정신은커녕 수업 내용부터 아이들 마음에 닿았을 리 없다. 그간 나름대로 수업을 꾸리고 무사히 해내온 시간은 잠긴 물병을 열심히 흔들어댄 과정일 뿐, 그 결과는 흐르지 못한 물이고 계획에는 사람이 없었다.
뚜껑을 열기 위해 먼저 나 자신을 상담해보기로 했다. 오랫동안 잠긴 나의 마음에 공감하고, 어떤 게 가장 걱정되는지 물어보았다. 임용을 준비하며 수없이 연습했던 수업을 교실에서 풀었더니, 현장은 시험장과 달리 모든 것이 혼란스럽고 통제할 수 있는 것이 얼마 되지 않았다. 대부분의 수업 시간은 아이들의 선한 마음에 의존해야 했고 가끔 직면하는 돌발 상황에는 나도 모르게 감정적으로 대응했다. 아이들은 자주 싸우고 울며 각자 다른 이유로 힘든 사춘기를 보내는데, 카리스마도 현명함도 없었던 나는 점차 아이들과 학부모의 솔직함이 불편해지기 시작했다. 상담은 출구 없는 미로처럼 끝이 없었고, 속마음을 털어놓는 이들의 목소리가 버거웠다. ‘아이는 힘들어하는데 내가 해결해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구나’에서 비롯된 무력감과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 담임이라면 지금보단 낫지 않았을까’에서 비롯된 자괴감 사이에서 처음부터 약했던 신규 교사의 자존감은 꼬박꼬박 소진되었다. 상황이 나빠질 때마다 그 원인을 ‘모자란 나’로 돌리다 보니, 진심을 열어 보이는 것이나 아이들의 애정 공세에 화답하는 것 모두 공격의 빌미를 주는 것처럼 여겨졌다. 가장 두려운 것은, 정말로 남들 입에서 모든 상황이 내 탓이라고 확인받는 것이었다. 그래서 언젠가부터 나는 선을 긋고 무미건조하게 반응하며, 문제가 생기면 문제만 들여다볼 뿐 사람에는 관심을 주지 않았다. 그게 신규 시절이 내게 남긴 팁이자 그럴싸한 방호복이었다. 그리고 예전보단 노련해진 4년 차, 방호복은 습관이 되어 더 다가가도 될 상황에서도 나는 다가가지 않는다. 수업을 듣는 아이가 어떤 생각과 감정인지도 궁금해하지 않았다. 아이의 마음에 관심 없는 사람이 어떻게 미술의 자유로운 도전 정신을 가르칠 수 있을까? 무사안일주의의 안락함에 취해, 필요한 말만 건네는 사람이 어떻게 상대의 병뚜껑을 열 수 있을까? 내면의 소리를 가만 들어보니, 그동안 내 뚜껑을 단단히 잠그고 있던 것의 정체가 선명히 보였다. 그건 두려움이었다.
하요상 교수님은 끊임없이 무의식과 대화하며 교사 스스로 상처를 치유해야 한다고 했다. 상처를 두고 살면 결국은 남에게도 피해를 주게 되어있기 때문이란다. 과연 아닌 척 숨기고 묻었던 나의 아픔이 가장 중요한 아이들과의 소통을 막고 있었다. 방호복 속에서 느꼈던 ‘원래 못한다’는 무력감은 무럭무럭 범위를 넓혀 수업까지, 아이들에게까지 닿아있었다. 그러면서 ‘원래 못해요’ 소리를 지겨워하고 무엇이 아이를 주눅 들게 했는지 묻지 않았다. 수업은 쏜살같이 진행되었으나 그 속에서 정작 무엇이 이루어지고 있는지 알지 못했다.
내면과의 대화는 몰랐던 내 감정을 깨닫고 두려워했던 것을 바로 보게 하는 힘이 있다. 처음에는 거부감이 들고 외면하고 싶었는데, 답을 곰곰 생각해보는 과정에서 지쳤던 마음이 어느새 회복되어 있었다. 각자의 병뚜껑은 각자 스스로만이 열 수 있다. 다만 교사는 아이에게 호기심을 가지고 애정 어린 질문을 할 수 있다. 멀뚱멀뚱 종이만 바라보는 아이에게 어떤 점이 맘에 걸리냐고 물어볼 수 있고, 망했다고 자조하는 아이에게 망한 그림은 어떤 그림이냐고 물어볼 수 있다. 미술에 답이 없듯, 아이들의 답도 정해져 있지 않다. 당장 대답하지 못하더라도 괜찮다. 교사는 미술에 수없이 많은 재료와 방법이 있는 것을 보여주고, 앞으로의 성장을 믿고 지지하는 마음을 표현하며 아이가 내면의 답을 찾도록 지원할 수 있다. 긍정적인 발전을 믿어 의심치 않으며 생각과 감정을 물어보는 것, 그 속에서 교육은 이루어지고 아이는 병뚜껑을 열어 미술을 담기 시작할 것이다. 그리고 자유롭고 도전적인 미술의 정신에 조금씩 가까워질 것이다. by. 은재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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